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호와의 증인/역사 (문단 편집) ===== 1939년 9월 ~ 1945년 ===== > "최근에 받은 감시 보고서 때문에 얘기하고자 할 게 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소련]]을 점령하고 시간이 지나 통치가 안정화되면, 영토를 분할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온갖 종교인들과 평화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겠지. 솔직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병역과 전쟁협력에 반대한다는 점 외에는 아주 우리에게 협조적일 수 있다. 음주를 하지도 않지, 담배를 피지도 않지, 정직하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일꾼이다. 값진 인력이 틀림없다." > >Some information and observations of recent date have led me to draw up plans that I would like to bring to your attention. This concerns Jehovah’s Witnesses. . . . How are we going to govern and pacify Russia when . . . we will have conquered vast areas of its territory? . . . All forms of religion and the pacifist sects must be supported . . . , among all the others the beliefs of Jehovah’s Witnesses. It is well-known that the latter have characteristics incredibly positive for us : Apart from the fact that they refuse military service and anything to do with war . . . , they are incredibly reliable, do not drink, do not smoke; they are relentless workers and of rare honesty. For them the spoken word stands. These are ideal characteristics . . . , enviable qualities. > >ㅡ[[하인리히 힘러]], 게슈타포 책임자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 "금지된 이 종파는 전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불법 집회를 열고 '하느님의 증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범죄이다', '여호와께서 박해자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벌하실 것이다'와 같은 구호가 적힌 전단을 붙이고 있다. 보안경찰이 성경 연구생들의 활동에 대해 더욱 강경한 조처를 취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활동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ㅡ독일 보안경찰(지허하이츠폴리차이)이 1941년 4월에 작성한 기밀 문서인 「네덜란드 보고서」(Meldungen aus den Niederlanden) 유대인과 집시와 다르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향서에 서명하여 신앙을 포기하거나 독일군에 입대하여 탄압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http://www.holocaust-trc.org/PRJW.htm|나치 점령기 여호와의 증인의 저항과 나치의 탄압(Persecution and Resistance of Jehovah’s Witnesses During the Nazi-Regime 1938-1945)에 대해 쓴 에세이 모음]]][* [[https://books.google.co.kr/books?id=nPbr0XzlTzcC&redir_esc=y|홀로코스트 백과사전, 2001년 예일대 출간]]] 결국 이 시기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우슈비츠, [[https://www.ushmm.org/wlc/ko/article.php?ModuleId=10007860|다하우 수용소]], 작센하우센 등의 여러 수용소에 끌려갔다. 1937년 10월, 여호와의 증인이란 이유로 수감된 [[http://sunday-news.wider-des-vergessens.de/?p=7166|아우구스트 디크만(August Dickmann)]]은 1939년 9월 4일(전쟁 발발 삼 일 후) 신분증에 서명하라는 게슈타포의 요구에 불응하여, 독방으로 보내진 뒤 다른 모든 수감자들이 보는 앞에서 디크만 씨를 처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수용소장의 요구로 15일에 다른 신도들과 친형제가 보는 앞에서 SS에게 총살당했다. 이틀 뒤 [[http://query.nytimes.com/gst/abstract.html?res=9902E5DF173EE23ABC4F52DFBF668382629EDE|「뉴욕 타임스」지 독일 외신 보도]]에서는 “29세의 아우구스트 디크만이 ··· 이곳에서 총살 집행 대원들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게시하였다. 그리고 그가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점도 언급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우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가 공개적으로 처형한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었다.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4120_univ_cnt_01_sm.jpg]] 아우구스트 디크만, 1936년경.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5002_univ_cnt_01_sm.jpg]] 안제이 샬보트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5002_univ_cnt_02_xl.jpg]] 여호와의 증인은 이와 같은 서약서에 서명해 믿음을 부인하기만 하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17세 때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는 1939년 9월 15일, 양심에 따라 군 복무를 거부하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슈타이나허는 빈에서 6주간 구금된 뒤에 독일 베를린에 있는 모아비트 교도소로 이송되어 미결 상태로 구금되었으며, 11월 11일, 첫 공판을 받는 첫날 슈타이나허는 '''전쟁을 방해한다는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종교적 신념을 따르는 것이므로 관대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청원하였으나, 1940년 3월 2일에 독일 제국 군사 법원은 사형 선고를 지지하였고 결국 4주 뒤인 3월 30일, 슈타이나허는 베를린의 악명 높은 플뢰첸제 교도소에 있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나이는 19세였다.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는 처형되기 단 몇 시간 전에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작별 편지를 썼는데 세 줄은 나치가 삭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http://nosso.jor.br/bnai-brith-rio-83/|#]]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5034_univ_cnt_03_xl.jpg]] >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께 >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두 시간 전인 오후 7시에 제가 내일 아침 5시 50분에 처형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때가 결국 오게 되었군요. 주여 제게 힘을 주십시오. 정말이지 영은 간절하지만 육신이 약합니다. 저는 이곳 감방에 앉아 있습니다. 새벽 1시쯤 되었군요. 감방에는 저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습니다. 시간이 참 빨리 가네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대로 편지를 조금씩 쓰고 있어요. 밖은 춥고 또 눈이 내립니다. 주께서 부모님께 힘 주시길 빌어요. 저는 일하고 싶고,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겠다고 말로나 글로나 약속했지요. 그렇지만 도저히 총은 쏠 수가 없어요. 바로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요. 이제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곧 닥칠 일을 막을 수는 없지요. 힘내세요. 이 일로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두 분이 서로 더 가까워지셔야 해요.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저는 아직도 어린아이일 뿐이라서 주께서 힘을 주셔야만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3월 25일이라고 표시된 부모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25일, 부모님에게서 온 마지막 기별이군요. 새벽 3시 30분쯤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이토록 빨리 닥칠 줄은 몰랐습니다. [세 줄은 나치가 삭제했음] ··· 놀랐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1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거죠. 제 소지품을 받으시게 될 겁니다. 펜, 종이, 편지, 돈, 옷가지, 열쇠 등을 말이죠. 저의 진심 어린 안부를 조부모님께, 레지, 삼촌, 숙모, 할머니와 할아버지, 호크 씨 부부에게 꼭 전해 주세요. 함께 일하던 동료 모두에게, 저를 아는 모든 사람과 모든 친척에게도요. 아버지, 힘을 내시고 포기하지 마세요. 무너지시면 안 돼요. 다른 일에서 다 그러시듯 믿음에서도 강해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서로 지원하면서 굳세고 강해지셔야 해요. 주께서 두 분을 보호하시고 능력과 희망을 주시고 모든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두 분이 옳은 길에 고착하며 무사히 지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청하세요. 저 역시 두 분을 위해 주께 간청하겠습니다. 그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정말 나약한 존재라는 걸 절실히 느낍니다. 이 순간까지도 제게는 생각을 바꿀 기회가 늘 있었습니다. 저는 일하고 싶지만, 도저히 총은 쏠 수가 없어요. 이제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께 저의 인사와 입맞춤을 전합니다. 저는 10만 번이라도 언제나, 부모님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두 분의 게르하르트일 겁니다. 우리가 왕국에서 서로 다시 볼 때까지, 우리 네 식구 모두 다시 함께할 때까지. 기운 내시기 바랍니다. > >백만 번의 입맞춤과 함께. > >Queridos pais, > >Bem, não há muito que dizer. Fui informado duas horas atrás, às 7 horas da noite, de que vou ser executado amanhã, às 5h50 da manhã. Chegou a hora, que o Senhor me dê forças. O espírito está disposto, mas a carne é fraca. Estou aqui dentro da cela sentado, é quase 1 hora da madrugada, dois homens estão aqui comigo, o tempo está passando rápido, estou escrevendo esta carta aos poucos, à medida que as ideias vêm à minha mente. Lá fora está frio, está nevando de novo. Que o Senhor lhes dê forças. Eu estou disposto a trabalhar, e já prometi oralmente e por escrito que estou disposto a trabalhar o máximo, sem reclamar. Mas eu simplesmente não posso atirar e tudo gira em torno disso. Agora, que seja feita a vontade do Senhor; o que tem de ser será. Sejam fortes, não deixem que isso os desanime, mas que vocês fiquem ainda mais unidos, não desistam. Ainda sou muito jovem e só consigo me manter fiel porque o Senhor me dá forças, e é isso que peço a ele. Recebi sua carta de 25 de março. Dia 25, as últimas notícias que recebi de vocês. Agora são 3h30 da madrugada. Nunca pensei que tudo isso aconteceria tão rápido. [Três linhas foram censuradas pelos nazistas.] . . . surpresa, assim ninguém sabe o que vai acontecer no próximo minuto. Vocês vão receber meus pertences. Canetas, papéis, cartas, dinheiro e roupa, chave e algumas outras coisas. Por favor, mandem um forte abraço para meus avós, Resi, o tio, a tia, vovô e vovó, o senhor e a senhora Hock. A todos os meus colegas de trabalho, todos os que me conhecem e todos os meus parentes. Pai, seja forte, não desista, não fique remoendo sua dor, mas seja forte na fé e em tudo mais. Mãe, seja forte, firme e apoiem um ao outro. Implore ao Senhor que ele te proteja, que te dê poder e esperança e que te oriente em tudo, para que a senhora continue no caminho certo e que nada de ruim te aconteça. Eu também vou orar por vocês. A hora está chegando, eu realmente me dou conta de como somos fracos. Até o momento, tive várias oportunidades de mudar de ideia. Eu quero trabalhar, mas simplesmente não posso atirar. Bem, agora vou terminar. Abraços e beijos, meus queridos pais, vou ser sempre o seu Gerhard, mais de cem mil vezes, queria muito estar com vocês. Mas logo nos veremos no Reino, onde nós quatro estaremos juntos de novo. Fiquem bem. > >Um milhão de beijos. 1943년에 체포되어 겨우 19세의 나이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http://collections.ushmm.org/search/catalog/irn508832|안제이 샬보트(Andrzej Szalbot)]]는 “군복무를 거부하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증언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은 증인 조직에서 탈퇴한다는 뜻을 밝히는 동시에 그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즉각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으나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다. 유대인 대학살로 유명한 아유슈비츠 수용소에도 많은 신자들이 수감되었다. 1940년 6월부터 종전까지 5년 동안, 최소 110만명의 사람이 이곳으로 끌려갔는데 그중에는 400명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는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 기록에 따르면, 최초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수감자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었으며, 그 수용소로 보내진 수많은 증인 가운데 35퍼센트 이상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더불어 박물관 웹사이트에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역사에 관한 문헌에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수감된 여호와의 증인(수용소 기록에는 성경 [연구생]이라고 나옴)에 대해 간단한 언급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수감자들이 수용소의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도덕적 원칙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볼 때 이들에게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서로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 매일 저녁 점호가 있기 전에 함께 만났으며, 다른 수감자들과 성경에 관해 토의하는 비밀 모임들도 조직하였다.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나치에게 점령된 [[우크라이나]]에서도 격렬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집들은 창문들이 박살나고, 많은 신도들이 심한 구타를 당했다. 겨울철에 어떤 신도는 성호(聖號)에 십자가를 긋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찬물 속에 강제로 몇 시간 서 있거나, 막대기로 50대의 매를 맞기도 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 기간 동안 나치 독일에 부역한 가톨릭과 개신교계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종종 고발했는데, 일례로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전 시간 봉사를 하던 일리아 호부차크가 가톨릭 사제의 밀고로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4107_univ_cnt_01_lg.jpg]] 1940년에 노이엔가메 강제 수용소를 짓는 일에 동원된 리하르트 루돌프. (지붕 위, 맨 오른쪽) 리하르트 루돌프란 신자는 나치 치하에서 9년간 수감 생활을 하면서 다섯 군데의 강제 수용소를 거쳤고, 그 가운데는 악명 높은 작센하우젠 수용소와 노이엔가메 수용소도 있었는데, 그 두 수용소에서 30만 명 이상이 수감 생활을 했으며 14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사망하였다. 1944년에 루돌프는 [[http://www.alst.org/pages-us/activities/neuengamme-announcement.html|노이엔가메 강제 수용소]]의 부속 시설인 잘츠기터-바텐슈테드로 이송되었고, 종교적 신념 때문에 탄약 생산과 관련된 작업을 일체 거부했으며, 그로 인해 처형당할 위험에 처했다. 하지만 루돌프의 종교적 신념에 감명을 받은 한 친절한 친위대 장교가 그를 식품 수송 트럭에 숨겨 준 덕분에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루돌프는 후에 동독에서 여호와의 증인으로 종교 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1950년에 다시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결국 종교적 신념 때문에 모두 합해서 총 19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나치의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도 여호와의 증인 450명이 수감되었다. 수용자들을 인솔하던 사령관은 “성경 연구생은 여기서 한 사람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다."라고 협박했지만, 신자 중 한 명인 마르틴 푀칭거(Martin Pötzinger)는 다하우와 마우트하우젠과 구젠에서 9년간 수감되었다가 살아남아서 나중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지도부 성원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마우트하우젠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에 대해 “게슈타포는 우리의 믿음을 꺾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고 증언하였다. 마우트하우젠에 있던 일부 증인들은 나중에 구젠으로 이감되었는데, 구젠 강제 수용소는 주로 “살인 수용소”로 운영되었다. 증인들은 강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밤에 소규모로 모여 기억에 의존해서 성구들을 토의했으며, 한번은 성경을 한 권 구한 적도 있었는데, 그 성경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돌려 보았으며 침대 밑에 숨겨 놓고 얼마 되지 않는 자유 시간에 읽곤 했다고 한다. 폴란드인 수감자 5명이 신자들과 성경을 공부했고 침례용으로 만든 길쭉한 나무 물통에서 비밀리에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증인인 프란츠 데슈(Franz Desch)는 친위대 장교에게 성경의 소식을 전했고, 그 장교는 나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나치친위대(SS) 장교나 병사들이 여호와의 증인 수감자들의 설득에 넘어가 여증에게 동조하거나 신도로 입단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치친위대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베벨스부르크 성에서 복무 중이던 고틀리에프 베른하르트의 경우, 니더하겐 강제수용소에 있던 에른스트 슈페히트란 여증 수감자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그가 자신에게 인사할 때 '하일 히틀러'라고 하지 않고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대화를 시도하였다. 슈페히트는 하일은 독일어로 구원이란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기 때문에 하일 히틀러라고 말할 수 없다란 대답을 듣고 여호와의 증인에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945년 4월 연합군이 진군해오자 힘러는 니더하겐 수용소의 여증 신자들을 집단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베른하르트가 수용소 책임자를 제지하여 에른스트를 포함한 여증 신도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후 이 장교는 아내와 함께 여증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연합군의 승리로 세계 2차 대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은 독일군과 소련군에게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큰 박해를 받았다. 이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아우슈비츠]]와 [[굴라그]]를 참조할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